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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정보/연극무대 _ 후기

2014.11.20 반도체 소녀 리뷰

이요상 2015. 12. 3. 23:58

 

[무대를 보고온 지 보름 뒤 올렸던 후기]

 

아직도 유효하기에 서글프다.

 

 

 

 

 

 

극의 전체를 지배한 이야기

그리고,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

 

 

S사 근로자 뇌종양 발병, 산재 신청-

벌써 지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이미 떠나간 사람이 되어버렸다. 소녀는 죽었고, 재판은 끝이 났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이 다시 항소한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끝나도 끝이 아닌 것이다. 끝은 과연 있을까.- 그렇기에 아직, 유효하다.

 

(아니, 항소 따위 없었어도, 완벽한 승소였어도, 이게 끝일리가 없다. 직장인인, 월급쟁이인, 乙인 우리들 모두가 알고 있다.)

 

 

2010년부터 공연장을 찾을 기회가 많았는데, 이제서야 걸음했다. 마침내 '승소' 라는 기사를 읽었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끝이 나지 않은 비극을 보는 것은 참으로 힘겨운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실화를 바탕으로 재연하는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모티브나 설정 정도야 그러려니 하지만 결말마저 비극적으로 재연된다면, 그 순간부터 이야기는 이야기로 남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일'이다. 남의 일일 지언정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일일 지언정, 진짜로 일어났던 이야기들은 싫었다. 끝없이. 엔딩없이, 누군가의 기억속에서는 계속해서 반복되면, 그것은 현재로 남는 것이다.

 

 

극을 보는 내내, 나는 무대 위의 풍경을 이야기 처럼 바라봤다. 지나간 일. 옛날에 있었던 일.

재능 교육 앞에 앉아서 시위를 하는 그녀, 삼성 정규직에 청춘을 바치는 청년.

그냥 저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겠거니, 그래도 대기업에 이력서가 통과하고, 면접을 보러가는 기회가 오는 저런 사람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현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삼성을 목표로 하는 남자는, 비정규직 여자를 원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무대 위의 여배우가, 노동운동歌 한곡을 불렀다.

노교수와 마주 앉아 그냥 노래처럼 불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연극은 그냥 무대였고, 무대는 그냥 이야기 였다.

그때 객석에서 누군가가, 그 노래를 낮게 따라 불렀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누구의 목소리일까, 따라 부른 이는 나와는 다른, 나는 가본 적 없는 세상을 아는 사람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극이 끝날 때 즈음, 객석의 불이 들어왔다. 나는, 극내내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무대가, 누군가의 '오늘'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객석 가득히, 빨간 깃발을 앞뒤로 붙인 성인들이 앉아 있었다 . LG 비정규직 노조. 나는 그들과 함께 반도체소녀라는 연극을 보았다. 무대위의 이야기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이었다. 죽은 소녀는 억울함과 비정함에 울었을 것이고, 객석에 앉아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싸우고, 버티고 있는 자 였다. 그리고 나역시도 정규직도, 대기업 사원도 뭣도 아닌 乙에 불과한 것이다.

 

내가 가지지 못한 무언가와 비교해서 서글픈 것이 아니었다. 내가 소녀와 다르지 않아서 울컥 했던 것이 아니었다.

학습지 교사는 여전히 개인사업자이고, 재능 교육 농성은 이천일 넘게 현재 진행형이다. L사고 S사고, 이익을 얻는자는 책임을 지지 않고, 나는 소비자 호구고, 그것을 무대가 끝나고 집에와 검색해 보고 알았다. 변한 것은 없다.

전태일 열사가 노동법을 지키라며 분신한 지 오십년이 다돼가는데, 대한민국 노동자들은 여전히 고공에서 오줌을 놓고, 법원의 복직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는 빌어먹을 회장

 

님 집앞에서 팻말을 들어야 하고, 씨발 사대보험 가입도 눈치 봐가며 구걸해야 하고, 주 사십시간은 남의 나라 이야기라, 공무원 경쟁률은 출산율의 80배가 넘는 살기좋은 나라라는 것을 자꾸만, 자꾸만 우리는 잊고 산다.

 

 

 

 

 

 

 

 

그래도 참,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무대를 만들어 주셨다. 재판이 승소하는 2014년까지, 무려 4년이나 꾸준히 무대에 연극이 올라왔다. 그리고 분명 이 공연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고, 보는 사람이 있고, 이것이 조금이라도 여론이 되어, 법원의 판결에 힘을 실어주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리고 내년엔,

후년엔,

 

십년 뒤엔, 정말 이 무대의 장면 장면들이, 지난 나라 이야기, 오래전 역사속의 한장면처럼 보였으면 하고,

아니 어쩌면, 이런 소녀가 있었다는 것, 그런 노래들이 있었다는 것. 그냥 동학농민운동쯤 하고 생각하는 날도 언젠가, 이다음에 오지 않을까 하고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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